3월을 넘어 4월까지 평균율을 듣고 있습니다. 예년과는 뭔가 다른 상황입니다. 저에게 평균율은 철저히 겨울의 배경 음악이었습니다. 십 년 좀 더 전에 살았었던 아파트는 바로 올림픽대로변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요, 저는 바로 그 올림픽대로가 보이는 창 밑에 책상을 두고 일했습니다. 저희 집이 있었던 3층은 방음벽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으니 책상에 앉으면 절반은 방음벽, 절반은 올림픽대로 너머 한강의 풍경이 보이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풍경은 계절에 상관 없이, 사시사철 겨울의 느낌이었습니다. 아마도 방음벽도 회색이고 창문에도 회색 먼지가 잔뜩 껴서 그랬겠죠. 하여간 그런 풍경이 보이는 책상에 앉아 평균율을 들으며 일을 했었습니다. '외식의 품격'을 썼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균율을 들으면 그 풍경이 떠오르곤 합니다. 십 년도 더 지나니까 이제는 기억이 좀 흐릿하네요.
하여간 겨울 음악을 지금까지 듣는다는 건 마음이 아직 겨울에 있거나 뭐 그런 상태일 수도 있겠는데요, 낮 최고 기온이 이십 도를 넘나드는데 이제 그만 좀 들어야지, 라고 생각해 놓고도 어젯밤에 또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권이 끝나는 두 시간 반 동안 선잠에서 자다깨다를 되풀이하며 끝까지 들었습니다.
저에게 평균율은 2권입니다. 사실 다소 경쾌한 느낌의 펼친화음으로 시작하는 1권의 도입부를 무척 좋아하지만 이상하게도 2권에 더 정이 갑니다. 특히 굴다의 1973년 연주로 들으면 살짝 가벼운 것 같은 음색과 담담한 터치가 저에겐 겨울의 여정 속에 잠겨 있는 마음처럼 다가옵니다. 그래서 마음의 동요가 있을 때 듣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1권도 곧잘 듣습니다. 사실은 1권을 더 많이 들으면서 2권을 더 좋아하는, 다소 모순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1권은 2016년쯤인가 씨디로 발매된 리흐테르의 "목욕탕" 음반을 좋아합니다. 이정도면 정말 리버브가 과한 것 아닌가 싶지만 나름 곡은 물론 연주와도 잘 어울립니다. 그래서인지 1권은 듣고 있으면 감정이 북받쳐 오릅니다. 2권과는 정반대인 것이죠. 대신 이 "목욕탕" 음반으로 2권은 듣기 어렵습니다. 대가에게는 미안하지만 번지수가 완전히 틀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요즘은 약간 내려 놓은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작년 말에서 올 1, 2월로 이어지며 겪은 일들에 대한 마음의 피로가 좀 지나쳤다는 느낌이 들어 이번 달까지는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날씨는 좋고 집은 너무 블랙홀 같아서 오전에는 집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오후에는 밖으로 돌고 있습니다. 특히 뜨개에 열중해 작년 10월에 착수한 스웨터를 다 떴습니다. 뜨개가 너무 좋아서라기보다 지금 할 수 있게 되는 일이 이것 밖에 없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은 꽤나 뿌듯합니다.
지난 주에는 생일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결국에는 쇼핑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후기는 인스타그램에 길고 장황하게 써 두었습니다. 어제는 연남동을 지나치다가 목련꽃잎이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데다가 꽃잎이 크고 희면서도 두꺼워서 목련의 최후는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곤 합니다. 좋아는 하지만 마음의 짐이 될 수 있으니 모든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유난을 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 계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