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제 공영 방송의 라디오 출연을 불과 3주만에 그만뒀습니다. 시작부터 삐걱거린 일이었습니다. 오후 3시경의 생방송이었는데, 첫 출연날 혹시 몰라 집에서 굉장히 여유있게 출발했더니 여의도에 버스가 들어서자 작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가 시간을 잘못 알려줬다면서 15분 뒤에 출연해야 되는데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하, 나의 불안이 이럴 때는 쓸모가 있구나! 그래서 저는 이미 방송국에 거의 다 왔으니 걱정하지 마시라 이야기하고 시간에 맞춰 도착해 마치 용광로에 던져지듯 생방송에 출연했습니다. 그때는 하하, 참 일을 이런 식으로 할 수도 있구나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출연은 설 연휴라고 해서 녹음을 했는데 광고가 나가지 않으니 평소보다 좀 더 길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원고를 넉넉하게 준비했고(맞습니다, 원고를 무려 제가 씁니다!) 거기에 받은 추가질문까지 더해 최종 정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채 1주일도 되기 전에 다시 여의도에 건너가서 녹음을 했죠.
녹음을 마치고 마침 거기 근무하는 지인과 오랜만에 만나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오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에도 작가였는데, 편집을 마치고 보니 제 출연 분량이 너무 짧다며 연휴 전에 다시 와서 녹음을 해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전문가"라는 명목으로 이런 프로그램들 대부분이 원고를 출연자에게 쓰게 합니다. 저도 제가 쓰는 게 속편한 구석도 있기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하기는 합니다만, 저는 방송 전문 인력이 아니기에 쓰는 원고가 어느 정도의 시간 분량이 될지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런 것은 분명히 작가와 프로듀서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 일을 다 한 다음에서야 제 분량이 모자르고, 그것이 마치 저의 책임인 듯 이야기하는데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저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작가의 늘어지는 제안이었습니다. 두번 오라고 하는 게 미안하니 아예 그 다음 회 분량까지 준비를 해서 2회분을 녹음하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1월 말부터 지난 주까지 거의 매일 마감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다음 회분의 소재를 준비해서 원고까지 쓸 여유가 전혀 없었죠. 그래서 저는 그럴 수 없으니 그냥 이번 회만 재녹음을 하시자고 이야기하고 대화를 끝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자기네가 그냥 알아서 처리할 테니 두 번 녹음은 하지 않기로 하자고요. 하지만 저는 마음이 불편했기에 궁리 끝에 집에 있는 장비로 제 출연분을 재녹음 해보았습니다. 아실 수도 있겠지만 저희 집에도 여러 이유로 방송국 정도는 아니지만 쓸만한 녹음 장비가 있고, 이것으로 다른 방송 출연때 급한 부분을 녹음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녹음을 해서 보냈는데... 쓸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짚이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리고 3회차 출연을 위한 원고는 아예 대화까지 제가 써서 보냈습니다. 어차피 내용을 만드는 사람이 저라면 흐름도 제가 잡아 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만에 가공된 원고가 왔는데 메일에는 '"가이드"나 "코칭"을 원하시는 것 같던데 원고를 좀 더 깊이 있게 써 달라는 내용 등의 요구사항이 딸려 왔습니다.
출연자에게 가이드나 코칭이라는 용어를 쓰는 제작진을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저는 다만 생방송이고 하니 말의 빠르기 정도에 대한 피드백 정도를 듣고 싶었을 뿐인데 점점 더 많은 요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가에게 이런 수준이라면 너무 많이 요구하시는 것 같다고 카톡으로 이야기를 했더니 한마디로 '그럴 거면 그만 둬라, 그만 둘 거면 빨리 그만 둬라'라는 반응이 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비참한 현실은, 이 라디오 프로그램의 출연료가 고작 64000원이라는 점입니다. 네, 저는 사실 이전에도 공영방송의 라디오에 출연했던 적이 있고 매우 즐겁게 일했습니다. 라디오를 듣고 자랐던 세대이기 때문에 출연 제의가 반갑고 그래서 돈이 안 되더라도 합니다.
하지만 라디오 출연은 정말 돈이 되지 않고, 특히 공영방송의 출연료는 다른 매체에 비해서도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원고 작성과 출연에 거의 하루를 다 써야 하고 생방송이라면 대기와 출연의 스트레스도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예전이라면 방송에 출연하면 지명도가 늘어날 것이라는 핑계라도 댈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다음 날 아침, 즉 출연날 프로듀서가 전화를 했고(모든 의사 소통이 근거를 남기지 않겠다는 듯 전화로 이루어졌는데 저는 이것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런 상황이라면 더 이상 출연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오후, 마치 앞으로 계속 할 것처럼 마지막으로 출연하고 방송국을 떴습니다.
제가 출연하고 잠시 노래를 트는 3분 동안 프로듀서는 이야기를 하자고 했지만 저는 에너지를 더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방송이 끝난 뒤 통화하시자고 이야기를 하고 시간에 맞춰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더 할 이야기가 없고 애초에 보수가 이렇게 현실성이 없는 차원에서 이런 요구와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 필요가 없으니 좋은 후임자를 찾아 알차고 재미있는 방송을 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전화가 울렸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지만 공중파도 케이블 방송도 보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이사를 한 뒤 8개월째 인터넷에 연결하지 않아 OTT 또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전기요금에서는 수신료가 꼬박꼬박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저 같은 사람들이 내는 돈으로 돌아가는 방송국인데 거마비의 표준이라고 말할 수 있는 10만원도 안 되는 출연료로 사람의 하루 시간을 다 쓰고 그것도 모자라서 더 많은 요구를 합니다.
저는 이런 현실이 전혀 이해 되지 않고, 이런 방송이 매체로서 공정성과 정의 같은 것들을 들먹이는 것도 위선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저의 뉴스레터가 평소보다 과격하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최근 이러한 일들이 여러 건 한꺼번에 벌어지는 바람에 저는 크게 상심해서 사실 며칠 동안 밥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내가 무엇을 좀 더 잘했더라면 됐을까? 이제 이렇게 무슨 일이 생기면 원인을 내부에서부터 찾는 제가 저는 싫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