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였나요? 잠이 잘 안 와서 콘클라베 생중계를 보았습니다. 지난 레터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이제 표면적으로는 냉담자이지만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새 교황의 선출에 대해 신자나 덕질하는 이들처럼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 속에 굉장히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는 것을 느끼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감정은 긍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천주교는 이를테면 마음의 고향 같아서 근 20년 냉담중이지만 지금도 모든 것이 매우 친숙합니다. 미사의 분위기부터 성가의 곡조도 그렇고요, 아마 툭 치면 주기도문 성모송 사도신경 같은 기도들은 여전히 줄줄 읊을 겁니다. 참고로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여름성경학교로 성체성사를 받았는데요, 3~6학년 어린이들 전체를 통틀어 1등으로 수료를 해서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신학교를 가지 않겠느냐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그런 천주교의 문화랄까요? 오랜만에 접하니 나름 푸근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감정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동성결혼을 비롯한 LGBTQ+에 대한 근본적인 배타적 자세랄지, 여성의 소외(수녀님들의 식복사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죠), 성 추문이랄지 회계 재정 비리, 심지어 '신부의 자식들(...)'이라는 사람들마저도 있는데 이 모든 문제에 대해서 과연 교회가 잘 대처하고 있는가 근본적인 회의를 품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고, 한편 필리핀의 타글레 추기경이 아시아인으로서 교황이 된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서 기다렸는데 낯선 미국인이 나오는 것을 보고 솔직히 놀랐습니다. 미국인을 교황으로 꼽다니! 아시겠지만 이미 미국은 지구에서 가장 막강한 국가이므로 14억인가요? 천주교 신자의 수장인 교황까지 자리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타부가 있다고 합니다. 그걸 미국인들도 잘 알고 있었고요.
그런데 미국인 교황... 하지만 약력을 들어보니 페루에서 오래 선교를 했으며 국적 또한 취득을 한 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음 이것은 트럼프와 이후의 바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서 추기경단이 선택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계속 보도가 나오고 있기는 합니다만 '가장 미국인 같지 않은 미국인'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요.
이 '미국인 같지 않은 미국인'은 요즘의 미국 돌아가는 꼴을 감안하면 굉장한 칭찬입니다. 뭐랄까 소탈하고 겸손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우직하고... 말하자면 '아메리칸 드림'이 실존할 때의 미국인이랄까요? 사실 그래봐야 백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한계는 있다고 봅니다만 제가 미국에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할 때에 빠르게 사라져 가기 시작한 인물상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젠 종교도 없습니다만 교황의 소감이며 축복 등등과 그 다음 날 집전한 추기경들과의 미사도 생중계로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아 내가 지금 혹시 종교로 되돌아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뭐 답은 너무나 뻔하게 '아니오'죠. 생각을 해보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성당을 다니기는 했습니다만 저에겐 믿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믿는다는 건 결국 의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일 텐데 그럴 마음을 못 먹었습니다. 의심이나 이런 것이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숫기 같은 것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자리에서 '월플라워'가 되는 것처럼 저 믿음을 가진 사람들 속에 저의 자리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궁극적으로 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도 이런저런 교황 관련 뉴스를 찾아 보면서 미국이나 영국의 주교들 이야기 등등을 듣고 있었습니다. 뭐랄까요, 믿음에서 더 나아가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어떤 논리 정연한 말들, 또 나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성직자의 바르고 곧고 인자해 보이는 모습 등등을 오랜만에 접하니 오랜만에 '아, 저런 세계가 있었지'라고 새삼 상기하는 그 자체가 나름 즐거웠습니다.
어제 오늘 날씨에 어울리는 노래를 놓고 물러갑니다. 5월 중순인데 일교차도 크고 싸늘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