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밤, 문득 침대에 누워 평균율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원래 평균율은 겨울의 곡들인데 지난 계절엔 이상하게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들리지 않았다는 표현이 아마 적절할 것입니다. 큰 이유는 특히 1권에서 최고라 꼽는 프리드리히 굴다의 연주가 애플 뮤직에서 막혀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작권 문제 같은 게 있는 모양이지요.
그렇다면 차선으로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의 연주가 있는데요, 그의 연주는... 언제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평균율이라도 말이죠. 그래서 약간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제는 차라리 그런 연주가 더 듣고 싶어졌습니다. 평안을 가져다 주는 연주가 아닌, 속을 뒤집어 놓는 연주가 듣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미 너무 뒤집어진 속이라 더 뒤집을 곳이 없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들고 싶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뉴스레터에서 말씀을 드렸듯 최근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 이후에 산 사람들끼리 남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 상당히 웃겨져서 약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야깃거리로는... 숙주나물을 열심히 먹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고기를 볶고 달궈진 팬에 숙주를 한 봉지 다 털어 넣고 숨이 적당히 죽을 때까지 볶아줍니다. 딱히 노동력이 많이 들지도 않을 뿐더러 어떻게 익혀도 먹을 만한 상태가 되어서 자가조리가 부담스럽다 싶으신 분들에게도 권합니다. 채소가 비싸도 맛도 별로 좋지 않은 현실 속에서 숙주나물은 좋은 대안입니다. 볶아 먹기엔 콩나물보다 훨씬 부드럽고 좋죠.
저희집은 외가가 이북이어서 특히 겨울이면 만두를 많이 해 먹었는데 신기하게도 숙주나물을 넣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숙주나물이 재미있는 건 콩나물처럼 데쳐서 무치면 맛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볶는 게 낫다고 말씀을 드리는 건데 마무리 간은 연두로 하실 것을 권합니다.
중간휴식이 있는, 3시간 30분이 넘는 작품이라 머뭇거리다가 홀연히 나타난 귀인 덕분에 '브루탈리스트'를 보았습니다. 에이드리안 브로디가 나오는,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1950년대의 미국이 배경인 건축 영화라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길이 등등으로 잡은 분위기와 심각함에 비해서는 무난하게 재미있는데요, 다만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태인들인 라즐로(브로디)와 배우자 에르제벳(펄리시티 존스), 그리고 조카인 조피아 세 사람 인물이 깊이가 좀 얕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각본과 연출이 덜 받쳐준 것을 배우들이 개인기로 메워준 느낌입니다.
제목과 달리 브루탈리스트에 등장하는 건축은 엄청나게 '브루탈'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라즐로가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를 밝히는 장면은 왠지 전공자로서 울컥했습니다... 네 저도 바우하우스에 가본 적 있습니다) 거의 미니멀할 정도로 현대적입니다. 미니멀리즘과 더불어 브루탈리즘을 가장 좋아하는 사조로 꼽는 전공자의 의견입니다.
총 두 번의 연재에 걸쳐 200화, 대략 원고지 4천매가 넘는 글을 쓰고 한국일보의 연재를 마쳤습니다. 약 8년 만의 일입니다. 원래 세 번째 연재를 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습니다만 내부 사정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번이야말로 진짜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겠다! 라는 생각으로 뉴욕타임스 '와이어커터'의 식품 버전 같은 컨텐츠를 준비했는데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면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긴 합니다. 8년이면 참으로 긴 세월이죠. 그냥 이 일이 수입의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기에 놓아 버릴 수가 없는 측면이 있어 집착을 했습니다. 그 8년 동안 '딱 이 만큼의 일 하나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찾아는 보았습니다만 이루지 못한 채로 이 지면도 끝을 내네요. 역시 글쓰기로는 돈을 잘 벌어 먹고 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당분간 살림이 좀 쪼들릴 수도 있지만 여한은 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지난해 후반부터 계속 글쓰기 15년차가 지나면 뭔가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해봐야 되겠다 생각을 해왔습니다. 이 일도 이렇게 끝나고 나니 싫더라도 그렇게 해야될 것 같습니다. 흐름이 그렇게 가고 있는 것 같네요.
3월이 왔지만 기온에 비해 바람이 아직 많이 찹니다. 저는 감기에 걸려 한 일주일 번거로왔습니다. 무엇이든 번거로운 일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