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격조했습니다. 아, 일이 좀 많은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계속 쳐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연이 한 건 쿵, 하고 떨어졌습니다. 그것도 당장 9일 뒤의 건이었습니다. 뭐 생각할 필요가 없이 누군가 펑크낸 자리에 들어가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억지로나마 당일치기 장거리 여정에 저를 몰아 넣을 수 있는 상황이 좋아서 한다고 그랬습니다. 제가 자발적으로는 어딘가 움직일 수 없는 정신상태로 살고 있어서 올해는 휴가도 가지 않았거든요. 그런 현실인데 부산을 갔다올 수 있다니 너무 좋다고 생각하고 응했습니다.
그리고 이후는 한참 동안 정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올해 내내 '아 난 하나도 바쁘지 않다'라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 이유로 일을 예전보다 빨리 쳐낼 수 있게 된 것이지 건수로 따지자면 예년에 비해 좀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정신도 육체도 소모가 많이 되는 강연이나 방송 출연이 후반기엔 매달 적어도 한 건은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일들을 다 쳐내니 장염의 신호가 왔고, 저는 덕분에 확신했습니다. 그래, 진짜 바쁜 게 맞았구나. 매년 한두 번, 몸살로 둔갑한 장염이 찾아옵니다. 온 몸이 쑤시고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합니다. 이때 잽싸게 병원에 가서 초동 대처를 잘 하면 호미로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컨디션이 안 좋구나 며칠 쉬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고 그냥 두고 잠이나 더 자는 식을 대처했다가는 가래로 막기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한동안 괜찮았던지라 별 생각이 없었다가 갑자기 장염이라는 깨달음이 왔고 대처한 덕분에 금세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아직 한 50일 더 남았지만 올해는 재미있는 한해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아주 복합적인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긍정적으로 재미있기도 했지만 부정적으로도 재미있었고, 외적으로도 재미있었지만 특히 내적으로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다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저는 지난 달 말 갑자기 '구운 계란을 사먹을 수가 있었지!'라는 깨달음이 와서 이후 미친 사람처럼 의존해 살고 있습니다. 편의점에서 파는 것보다 덜 뻣뻣해서 좋고 무엇보다 껍데기를 쉽게 깔 수 있어서 좋습니다. 덕분에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있습니다.
영국의 밴드 큐어가 16년만에 새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선공개된 곡들이 좋다 생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대단한 결과물이었습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활동한지 45년이 되어도 이렇게 밀도 높고 충실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을 정도의 명작입니다. 매우 인심 좋게 3시간짜리 공연의 영상을 무료로 풀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 권해 드립니다.
아직도 포근한 날씨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나날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