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 2학년으로 올라가며 저는 꿈에도 그리던 건축과 학생이 되었습니다. 이제 막 이십대로 접어들 철부지에게는 참으로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왜 2학년이 되어서야 건축과 학생이 되었느냐고요? 제가 전과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로도 긴 이야기라 오늘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전과를 목표로 삼은 상태에서 보냈던 대학 1학년은 종종 살 떨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만약 실패하면 어쩌지? 수학과 물리로 빼곡한 화학공학과를 다녀서 업으로 삼을 자신은 도저히 없었습니다. 실제로 다녀보니 제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저에게 맞지 않는 지옥이었습니다.
각설하고, 1995년 3월의 저는 참 행복했습니다. 결국 '아싸'로 대학생활을 쭉 했던 주제에 개강잔치에 참석해서 전과생으로 소개를 받고는 단상에 올라가 '건축과 학생이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어쩌구 하는, 지금도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 이야기를 상기된 목소리로 뱉었더랬습니다.
하지만 저의 그런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2학년으로 뛰어들었더니 무엇보다 실기에 적응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PC 통신(네, 참으로 옛날이죠...)으로 미리 사귄 건축과 친구들에게 조언을 얻어 겨울방학에 뭔가라도 했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뭐, 열 아홉 살 겨울이었으니 놀기 바빴겠죠.
하여간 아무리 하찮고 우스운 제도 같은 기본 과목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1학년 때 해 본 학생들과 저는 일단 멘탈의 차원에서도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는지 이미 1년 동안 익히며 준비가 되어 있었고 저는 아니었죠. 또한 학교 스튜디오에서 오랜 시간 동안 같이 그런 작업을 하며 나름 쌓아온 친밀감도 무시할 수 없었고요.
어려움은 비단 실기에서만 저를 압박하지 않았습니다. 건축과로 가면 이 무서운 수학과 물리(학창시절 저에게는 이 두 과목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도 언젠가는...)를 하지 않아도 되겠거니 막연히 기대했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일단 미적분처럼 외워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공업수학이 공대 2학년에게 공통 교양이었으며 건축 전공자들을 위한 물리인 동역학과 구조역학이 군침을 질질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와, 정말이지 여러모로 적응이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왕복 3시간 30분은 최소한으로 걸리는 통학은 왜 그리도 힘들던지요. 무려 지하철 5호선도 개통되지 않았었던 시절, 수원에서의 통학은 아무리 쇠도 씹어 먹을 것 같은 스무 살에게도 종종 힘에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며칠 밤을 새우고 집에 돌아오다가 길거리에서 졸아 정신을 잃는 일도 있었죠.
그래서 저는 차츰 기가 죽어갔습니다. 건축을 전공하기로 했었던 결정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지만 모든 게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조금씩 건축의 맛을 보아 가면서 제가 시각적 사고에 밝지 않고 건축, 특히 하고 싶었었던 설계가 우선 요구하는 전반적인 '스킬셋'에 그다지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안 그래도 설계실에서는 분위기가 종종 험난해지곤 했습니다. 제가 졸업한 학교는 꽤 많은 학생들을 받아 건축에서도 공학 분야 쪽의 인력을 양성하고 정말 재능 있는, 말하자면 하나 가르쳐 주면 열을 알아서 깨우치는 많지 않은 수의 엘리트들만 설계를 포기 않고 끝까지 하는 문화가 배어 있었습니다. 수틀리면 재떨이를 던지는 학과장은 유명했고 웬만하면 C를 줘서 설계를 포기하게 만드는, 도가 사상에 젖어 있는 겸임교수도 있었습니다.
1학년 때부터 다녔고 재능이 있어도 모자랄 판에 1년 늦게 합류하고 재능도 별로 없어 보이는 나는 어쩌나? 더군다나 2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해야 하는 상황, 지금 생각해보면 다 별 거 아닌 것 같았습니다만 스무 살에는 그 모든 게 다 너무 큰일 같아서 저는 학년이 진행되면서 의욕을 서서히 잃어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적당히 말아먹고 입대 휴학을 하게 되죠.
갑자기 웬 삼십 년 전 추억 타령이냐? 하실 텐데요, 며칠 전 원로 김태수 건축가의 인터뷰를 읽어서 그렇습니다. 국립 현대 미술관의 설계자이자 학창시절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김태수 장학금'의 설립자이기도 한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았는데요, 인터뷰에서 초월적으로 잘하는 거장의 인간적인 면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불현듯 옛날 생각을 한참 했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저는 '아 내가 정말 건축을 계속 해도 될까?'라는 아주 말초적인 수준으로 고민할 정도로 자신감이 부족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좀... 미욱했죠. 지난 삼십 년 동안 온갖 일들을 다 겪고 나니 설사 나 자신이 객관적으로 그렇게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그런 수준까지 고민하는 건 스스로에게 너무 해로운 일 같다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자기객관화가 참 좋고 필요한 덕목이기는 합니다만 종종 어떨 때에는 내가 나를 바닥까지 떨어지기 전에 잡아주어야 합니다. 이건 자기연민, 혹은 자기애와는 좀 다릅니다.
그런데 그런 말초적인 수준의 고민이 십오 년 뒤에 결국 영향을 미치긴 합니다. 그러니까 정리해고를 당했던 2009년 1월의 어느 날, 정말 소식을 듣자마자 찰나에 충동적으로 '건축을 그만 둬야지'라고 결심을 해버렸던 것도, 그 십오 년 동안 제가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그렇게 말초적인 고민을 끊임없이 해왔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더라도, 더 이상 그런 고민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압박을 가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잘한다고 믿는 걸 해야지, 나를 더 이상 몰아붙이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가 잘한다고 믿는 걸 하면서 어쩌면서 저를 더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요 며칠 날씨가 매우 좋았는데 내일은 또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래도 다음 주 수요일에는 부처님이 찾아오신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네덜란드에 가시고 맡겨졌었던 먼 옛날, 부처님 오신 날 예산 수덕사에 할머니와 함께 찾아갔다가 먹었던, 주발에 담긴 열무김치와 밥이 아마도 저의 가장 오래된 음식의 기억 같습니다.
*사족: 김태수 건축가의 인터뷰는 아레나의 박찬용 피처 디렉터의 '작품'입니다. 그가 맡은 뒤로 아레나에는 우량 컨텐츠가 젖과 꿀처럼 흐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